"내가 죽였어"...전쟁터에 아들 보냈던 어머니 절규한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 기사 요약
아들 잃은 어머니의 슬픔반전(反戰) 외치며 새기다케테 콜비츠(1867~1945)<div class="nbd_im_w _L
아들 잃은 어머니의 슬픔
반전(反戰) 외치며 새기다
케테 콜비츠(1867~1945)
'부모'(1921~1922). '전쟁' 연작 중 하나로, 아들을 잃고 웅크린 부모의 모습이다. /케테 콜비츠 미술관, 베를린
“아드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습니다.
1914년 독일 베를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지 두 달 만에 사랑하는 열여덟 살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습니다. ‘내가 죽인 거야.’ 미성년자였던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입대 동의서에 서명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케테 콜비츠(1867~1945). 오늘날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판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름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전쟁에 빼앗기고, 자책과 슬픔에 시달리다가, 가장 처절하게 반전(反戰)을 외쳤던 예술가. 그녀의 삶과 예술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케테 콜비츠.케테는 1867년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베를린과 뮌헨에서 유학하며 판화의 매력에 눈을 떴습니다. 붓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온몸으로 판을 깎아내고 찍어내는 판화가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에 딱 맞았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어느 날, 케테는 의사 카를 콜비츠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891년 결혼한 부부는 베를린 북부의 가난한 노동자 거주지에 정착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둘은 가치관이 꼭 닮은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카를은 아픈 빈민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의사가 됐고, 케테는 남편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직조공의 봉기'(1893~1897) 연작 중 하나. 케테 콜비츠 미술관, 베를린
'농민 전쟁'(1902~1908) 연작 중 하나. 케테 콜비츠 미술관, 베를린
1893년 발표한 ‘직조공의 봉기’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독일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이어 과거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발표한 ‘농민 전쟁’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케테는 ‘사회의 밑바닥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습니다.
가정도 행복했습니다. 1892년 장남 한스가, 1896년 차남 페터가 태어났습니다. 케테는 특히 페터를 아꼈습니다. “맑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케테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페터가 일곱 살이던 190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케테는 페터를 품에 안고 거울 앞에 앉아 에칭(금속판에 이미지를 새겨 넣는 판화 기법)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품 제목은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작업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케테가 한숨을 내쉬자, 품 안의 어린 페터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속삭였습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이것도 예쁘게 완성될 거예요.” 케테는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습니다. 훗날 자신과 아들의 모습이 이 그림 속 비극과 똑같아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1903). /케테 콜비츠 미술관, 베를린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은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독일 전역은 애국주의 열풍으로 들끓었습니다. 열여덟 살이 된 페터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친구들과 함께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다만 페터는 미성년자였기에,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의사였던 남편 카를은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에게 전쟁터는 그저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케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어머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뢰'라고 믿었습니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었습니다. 결국 케테는 동의서에 서명했고, 페터는 벨기에 플랑드르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지원병들(1920).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행진하는 모습이다. /케테 콜비츠 미술관, 베를린
아들을 보낸 직후부터 케테는 후회에 사로잡혔습니다. 일기에 썼습니다. "울고 또 울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미친 짓이다." 예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1914년 10월 22일 밤, 페터는 참전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전사했습니다. 부대에서 가장 먼저 쓰러진 병사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케테는 충격으로 쓰러졌습니다.
"아들
반전(反戰) 외치며 새기다
케테 콜비츠(1867~1945)
“아드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습니다.
1914년 독일 베를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지 두 달 만에 사랑하는 열여덟 살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습니다. ‘내가 죽인 거야.’ 미성년자였던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입대 동의서에 서명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케테 콜비츠(1867~1945). 오늘날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판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름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전쟁에 빼앗기고, 자책과 슬픔에 시달리다가, 가장 처절하게 반전(反戰)을 외쳤던 예술가. 그녀의 삶과 예술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베를린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어느 날, 케테는 의사 카를 콜비츠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891년 결혼한 부부는 베를린 북부의 가난한 노동자 거주지에 정착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둘은 가치관이 꼭 닮은 ‘영혼의 동반자’였습니다. 카를은 아픈 빈민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의사가 됐고, 케테는 남편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893년 발표한 ‘직조공의 봉기’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독일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이어 과거 역사 속 사건을 바탕으로 발표한 ‘농민 전쟁’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케테는 ‘사회의 밑바닥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됐습니다.
가정도 행복했습니다. 1892년 장남 한스가, 1896년 차남 페터가 태어났습니다. 케테는 특히 페터를 아꼈습니다. “맑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케테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페터가 일곱 살이던 190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케테는 페터를 품에 안고 거울 앞에 앉아 에칭(금속판에 이미지를 새겨 넣는 판화 기법)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품 제목은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작업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아 케테가 한숨을 내쉬자, 품 안의 어린 페터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속삭였습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이것도 예쁘게 완성될 거예요.” 케테는 아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습니다. 훗날 자신과 아들의 모습이 이 그림 속 비극과 똑같아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의사였던 남편 카를은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에게 전쟁터는 그저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케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어머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뢰'라고 믿었습니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었습니다. 결국 케테는 동의서에 서명했고, 페터는 벨기에 플랑드르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아들을 보낸 직후부터 케테는 후회에 사로잡혔습니다. 일기에 썼습니다. "울고 또 울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미친 짓이다." 예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1914년 10월 22일 밤, 페터는 참전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전사했습니다. 부대에서 가장 먼저 쓰러진 병사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케테는 충격으로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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